임경남 시인


불면


나는 오늘 밤도 상트페데르부르크로 간다
그곳에서
태양에 굶주린 부족들과 에르미타주 동굴 잔디 정원에서 드러눕는다
온 세상 모든 밤에다 불을 켜고
먼 길을 데리고 온 생의 연민을 바짝 말린다
이곳은 백야의 도시
불면이 합법화 되어 누구도 잠 들 수 없는,
몇 며칠 뜬 눈으로 보낸 도스트옙스키와
술병을 마저 비우는 동안
툰드라의 얼음장은 더 두꺼워졌을 것이다
우리를 떠나간 양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
지팡이로 얼음장을 콕콕 찧으며 양의 이름을 부르는데
북두칠성이
국자모양의 긴 팔을 늘여 뜨려
자꾸만 내 잠의 양수를 퍼 올린다

잠이 사라진 밤은 고장 난 흑백텔레비전 같다. 밤새 지지직거리느라 새벽은 너덜너덜한 채로 도착 했다. 두려웠다. 두려운 밤이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내가 몇 번이나 헤아리다 놓친 양들 사이로 생각의 잡풀이 우거졌다. 불면은 잠이 사라진 것도 문제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세상의 부정적인 이유들이 다 내게로 몰려와 휩쓸리는 게 더 큰 문제 였다. 밤새도록 쓸데없는 걱정에 부풀다가 아침이 되면 지쳐 쓰러져 버린다. 남편의 출근을 챙기고 나면 아수라가 된 내게 낮잠이 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무지막지한 적군처럼 갱년기는 이렇게 쳐들어 왔다. 지독한 불면이 우울을 불러왔고 무기력을 불러왔다. 집 안에만 담겨 있지 말고 집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라고 했지만 실상 나는 나갈 기운조차 없었다. 그때 친정 엄마도 자주 아파 몸과 마음을 나에게 걸치고 싶어 했다. 갱년기로 힘들어 하는 딸보다 엄마도 엄마의 생을 늙히느라 엄마에게도 엄마가 간절하던 때였다.

남편은 자주 늦었다. 늦게 퇴근하고는 밤새도록 코를 곯아 안방 가득 술 냄새와 피로를 풀어냈다. 침대 끝에 모로 누워 창을 내다보면 어둠 속에 가로등이 둥둥 떠 있고 새벽까지 자동차 소리가 내 귓가로 흘러들었다. 동사가 사라지고 관념만 남아 지리멸렬하게 떠다니는 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갱년기라는 것 외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아주 깊고 깊은 겨울의 동굴에 갇혀 잠이 소거된 백야를 충혈 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밤이 새벽이 되는지가 보고 싶었다는 헬런켈러의 둘째 날 소원을 날마다 지켜 본 셈이다. 그러다가 며칠 째 내가 잠을 잤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밖은 여전히 꽝꽝 얼어있고 거짓말처럼 자고 나면 아침이었다. 말끔히 닦인 화면 같은 하루를 얻어내다니!! 그러나 봄, 여름 가을, 지나 입동이 되면 또 불면이 시작 되었다. 절기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 잠은 기가 막히게 입동이면 찾아왔다가 입춘이 되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의 식물성이 놀랍기만 했다.

무엇엔가 사로잡힌다는 것은 내가 그것에 잡아 먹혀버렸다는 뜻이다. 갱년기에 잡아먹히자 북두칠성은 내 잠의 양수를 퍼 올렸고 이후로 나는 잠자리에 들면 잠이 오지 않을까봐 가슴 졸이느라 뇌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불분명 속에 생각은 생각 할수록 실체는 없고 형체만 부풀어진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지독한 불면이 나에게 시 한편을 주고 떠났다. 잠이 오지 않은 밤이 나에겐 백야였고 백야의 도시를 찾다가 상트페데르부르크를 소환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에르미타주 동굴이 있고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트예프스키도 있다. 북극의 이미지를 가져와 불면을 완성 하고 불면에서 빠져나왔다. 기본을 가지면 다 가진다는 말이 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변 한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큰 축복이다. 지금도 가끔 잠을 설칠 때가 있지만 더 이상 겁나지 않는다. ‘잠’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할 일을 놓쳐버리기도 했던 젊은 날을 지나 이제는 저절로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밝다고 했든가? 모든 게 선명해졌으므로 참. 좋.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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