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 몰아치는 산사에 오르니 적막(寂寞)함 더하고 오가는 인적은 간데없고 우뚝 선 산봉우리 얼어붙은 숲만 반기네 찬 바람 몰아치는 산사에 오르니 공허(空虛)함 더하고 하염없이 울어대던 산 새소리 들리지 않고 저 높은 하늘 흰구름만 반기네 찬 바람 몰아치는 산사에 오르니 무상(無常)함 더하고 향기 품은 화사한 꽃들은 자태를 감추고 앙상한
또 한 해가 허락 없이 달려간다. 몇 날 남지 않은 숫자들을 보며 초조함마저 든다. 올 한 해는 뭘 했지, 어떤 일을 해냈을까. 갑자기 반성과 후회가 쓰나미처럼 나를 할퀴었다. 누구나 첫사랑은 있었을 테다. 내게도 갓 스물 쯤 글로만 보던 사랑이 찾아왔다. 내 생에 첫사랑은 배신으로 시작했다. 여자 형제 없이 독학으로 배운 사랑은
독을 묻었네 마당을 파고 김치 독을 묻었네 흙에서 난 배추를 흙으로 만든 독에 담아 다시 흙에 묻었네 흙은 독을 발효시키고 독은 배추를 발효시키고 배추는 나를 발효시킬 것이네 맛이 깊어질수록 독은 점점 제 속을 비워 나를 끌어당길 것이네 겨울이 깊어갈수록 나는 독 안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갈 것이네
두더지도 살고 참깨도 사는 길 / 고재종 텃밭에 참깨씨를 뿌려놨더니 참깨순 쑥쑥 올라온다. 오르는데 요런 요망한 두더지들이 땅 밑으로 이 길 저 길 내는 통에 참깨 순 다 죽는다. 다 죽어선 어디 한번 해보자, 전쟁을 선포하고 그놈들 잡겠다고 골머리를 싸매지만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더더욱 낮만 아니고 밤에도 길을 내니 요령부득이
동해에 해 떠오르니 검푸른 파도도 잠에서 깨어나 세상을 머금는다. 밝히고 깨워라 그 안에 잠든 모든 만물이 용솟음치게 동해에 해 떠오르니 어부들의 뱃고동 소리 하늘을 찌르고 바다를 머금는다. 울리고 높여라 온 바다에 잠든 생물이 휘젓고 춤추게 동해에 해 떠오르니 하늘이 열리고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오며 천지를 머금는다. 열리고 밝
허물어버린 집/문충성 허물어버린 집이 요즘 꿈속에 나타나 온다 할머니 어머니가 사셨다 돌아가시고 나서 허물어버리면 안 될 집을 허물어버렸다 그 할머니 어머니 꿈속에 없어도 그 집이 꿈속에 나타나 온다 대추나무 감나무 당유자나무 산수국 매화나무 후피향나무 동백나무 채송화 몇 그루 저 멀리 혀 빼물고 헬레헬레 진돗개 진구가 나
연어, 포장마차로 회귀하다 그가 행복하냐고 물었다 뜨거운 그 무엇이 전류처럼 확 달아오르고 있을 때 찬바람이 불면 레나강을 돌아나온 해류를 따라 북극해에서 아시아로 헤엄쳐 가는 머나먼 여정 등지느러미에 물비늘 같은 꿈을 키워가며 어머니의 어머니가 일러준 모천회귀를 사는 것 어미의 강 어느 기슭에서 산고의 아픔
손 없는 날 로봇 청소기가 벚꽃의 뒤축을 따라다니고 있어 먼지 대신 꽃잎을 털어먹은 청소기가 속도를 피우는 밤 립스틱의 뿌리는 내 입술이야 입술을 지나온 말들이 웃음의 사각지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그날의 키스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 낡은 입술의 날들은 버려야해 결혼사진도 백과사전도 이십년이면 다 유물이지 남아 있는 손자국과
겨울밤 호롱불 일렁거리던 밤이었어요 연필에다 침을 꾹꾹 발라가며 숙제를 하는 동안 뒷산 시누대 일렁이는 바람소리 마을의 무릎까지 차올랐고요 또당또당 방안 가득 무 썰던 엄마의 도마소리 어린 나를 기워가고 있었지요 아무리 살아내도 수북한 외상값 같은 젊은 날의 엄마를 숙제장 뒤편에다 받아 적으며 나는 자주 체기에 시달리곤 했어요 가
크리스마스 반딧불이 시를 수놓는 남자가 혼자 산골에서 깜빡거려요 때때로 말문이 막히는 그곳은 6월이면 말 대신 반딧불 트리가 자라나죠 밤마다 트리를 켜놓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어둠을 먼 숲으로 흘러 보내고는 젖은 제 꽁무니를 털어 타박타박 잠이 드는 남자 매일 밤 이브의 문자를 보내와요 나는 푸른 잎사귀를 쌓인 38번 국도
빈 집 야반도주의 목록은 빚이거나 애정이거나 시골 옆집은 20년 째 빈 집이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궁리가 깊어지는 담장은 기름 냄새와 막걸리로 자주 인심을 부풀렸다 아무도 모르는 야반도주가 꿈틀거리던 그 밤을 마당 안쪽 감나무는 다 지켜보았을 것인데 애정이 식은 빈 집은 허물어지기 좋아 아랫목까지 풀꽃이 차오르면 빚을
뉴스 서문시장 불이 뉴스를 달군다 동동걸음마저 타버려 건질 것 하나 없는 저녁 현장기자의 허탈한 표정에도 그을음이 배어있다 발화지점은 비밀이고 비밀은 급성으로 자라난다 활활 타오르는 어처구니들 소방대원들은 물 젖은 하루를 잘 말려 입었을까 산산조각을 붙잡은 손들이 쿨럭거린다 싱싱한 등짐이 사라진 지금 붉은 비가 내리는데 12
변비 시를 누고 싶었다 시의 일이란 쉽게 마려워지지 않는 것 생각의 섬유질이라든가 형용사의 수분 함량이라든가 하루 종일 시집을 들이켜도 글자하나 빠져나가지 못하는 문장이 있다 넘길수록 늘어나는 페이지는 신호 대기 중 사방이 불편한 냄새로 쌓인다 더부룩한 아랫배는 관념을 빠져 나오지 못해 점점 단단해 진다 한낮을 목
4월을 출력하지마라 싱싱한 바다, 해안선을 당겨오다 출렁하면 우리 집 거실까지 흘러넘친다 비명은 급성으로 오는가 미친 파도가 맨 종아리의 봄을 들이받자 어처구니없는 별들이 밤마다 내려와 항구의 어둠을 읽고 간다 누가 버튼을 눌렸는지 해마다 사월이 끝없이 출력된다 를 읽고 있는 중이
농담의 온도 농담은 물을 머금으면 장대비가 되고 해를 머금으면 양떼구름이 된다 양떼구름 아래서는 천 년을 피어나는 해바라기가 되지만 장대비 내리는 하늘에서는 입술을 떠나온 말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농담은 듣는 사람들의 공기층을 두껍게 한다 불안전한 대기는 예측이 어렵다 나는 지금 벼랑이다 벼랑은 뾰족한 부분이 대
서귀포에서 -솔릭* 폭염에 멸종된 줄 알았던 바람의 소식을 이곳에서 듣는다 속수무책이다 살다보면 어쩔 수도 없는 상황이 코앞까지 닥치기도 하지만 안부마저 고립 된 날은 꼼짝없이 붙들려 이 밤을 관통해야 한다 무료한 날을 견뎌온 해변의 간판도 막무가내로 헝클어지는 바람의 만조시간 내게 전할 열대성
불면 나는 오늘 밤도 상트페데르부르크로 간다 그곳에서 태양에 굶주린 부족들과 에르미타주 동굴 잔디 정원에서 드러눕는다 온 세상 모든 밤에다 불을 켜고 먼 길을 데리고 온 생의 연민을 바짝 말린다 이곳은 백야의 도시 불면이 합법화 되어 누구도 잠 들 수 없는, 몇 며칠 뜬 눈으로 보낸 도스트옙스키와 술병을 마저 비우는 동
안녕, 안녕아플 땐 유목의 언어를 써야해단순해서 가벼워지는 말로그래야 쉽게 날아오르거든구름도 그렇게 날아올랐다가 소나기가 되는 거야사랑도 이별도 싱겁게 해석되어야 해유목의 연애가 아름다운 건 이별이 간편하기 때문이지몸이 감옥인 사람들저마다 깁스를 하고 링거를 달고지루한 잠이나 기다리지하얀 벽은 초조해 물감이라도 뿌리고 싶어중략한 차례의 내가 참았던 소나기로 뛰어내려야 해임경남 시집 에서 발췌어느 해 인가 3평짜리 텃밭농사를 한 적이 있다. 꽃밭처럼 키워야지 하고 시작한 것과 달리 어느새 출근이 되어
임경남 시인의 “詩로 인문학을 말하다” 손 없는 날 로봇 청소기가 벚꽃의 뒤축을 따라다니고 있어 먼지 대신 꽃잎을 털어먹은 청소기가 속도를 피우는 밤 립스틱의 뿌리는 내 입술이야 입술을 지나온 말들이 웃음의 사각지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그날의 키스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 낡은 입술의 날들은 버려야해 결혼사진도
귀 좀 빌려주세요 사랑은 속삭이는 동사로 읽는다 당신의 귀가 나를 향해 열리던 모음의 날들은 이제 돌아오지 않나요? 내 귀는 시들어 떨어지기 직전이에요 선글라스, 마스크, 이어폰, 귀걸이 귀에서만 서식하는 저 기표들은 눈만 남은 내 체온을 끌어올리는데 사랑이 어떻게 비대면 될 수 있나요? 입을 막았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