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남 시인


서귀포에서
-솔릭*


폭염에 멸종된 줄 알았던 바람의 소식을
이곳에서 듣는다
속수무책이다

살다보면 어쩔 수도 없는 상황이
코앞까지 닥치기도 하지만
안부마저 고립 된 날은
꼼짝없이 붙들려 이 밤을 관통해야 한다

무료한 날을 견뎌온 해변의 간판도
막무가내로 헝클어지는 바람의 만조시간
내게 전할 열대성 전보라도 있었던가
밤새 뛰어온 걸음이 유리창 앞에서 안간힘이다

갈매기들 새섬으로 돌아간 공중에는
사선으로 비가 내리고
채널마다 일기예보가 성업 중이다
야자수 나무는 일찌감치 바람의 방향으로 전향했다

눈만 남은 태풍이
쿵쿵거리며 밤새 서귀포를 두드리는데
이제야 알겠네
세상의 속수무책들이 다 이곳에 왔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어느 해 인가 3박4일 제주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올레길을 걷고 자전거를 타고 바다를 멍 때리고 온갖 자유가 내 것 인양 푹 빠져 있을 때 태풍 소식을 들었다. 마침 서귀포 바다 바로 앞에 숙소를 정하고 꼼짝 없이 이틀 발이 묶이게 되었다.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에서처럼 한 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뜻밖의 폭설을 만나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이고 싶다는 낭만은 아니었지만) 하루 종일 비가 사선으로 내리고 유리창을 쿵쿵 때리는 태풍을 바라보며 내 옆구리 어디쯤에서도 물이 콸콸 쏟아질 것 같았다. 그때의 풍경이 한 편의 詩가 되었는데 많은 여행이 있었지만 그 속수무책의 시간은 외따로이 내 인생에 지금도 고스란하다.

여행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로 돌아다님이라고 네이버는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수렵채집의 시절, 인류는 사냥감을 찾아 하루에도 50km이상 이동했다는 자료를 보면 고대 시절에도 길 떠나기는 일상인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생존을 위한 방랑이었고 이후 물물교환을 위해서는 더 먼 길을 돌아다녀야 했다. 고대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였고 중세는 종교적 순례가 목적이었다. 치안이 불안정 했던 그 시기, 여행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으니 돈 많은 귀족들은 아랫사람을 시켜 먼 곳을 다녀오게 하고 그곳의 여행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는 역사적인 사실도 흥미롭다. 다시 우주를 여행하는 미래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진짜 우주여행은 부자들만의 몫이라 나는 내 삶이 끝났을 때를 우주여행이라 칭하고 아직은 접어두어야 겠다.

그러나 저러나 이제 우리에게 여행은 일상이 되었다. 코로나에 갇힌 억눌린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일까? 여행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때 마침 가을이라 누구와도 물들 수 있는 이 시간은 참으로 귀하다.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마침 맞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맑은 날이 몇이나 될까? 서재 밖에 재활용 창고 지붕위로 드리운 단풍나무는 철철 붉다.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겨울을 나기 위해 물관을 닫는 시간일 뿐이지만 그걸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한 없이 붉어지는 계절이다. 꼭 멀리 가지 않아도 일상에 코 박은 나의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이것도 여행이다. 현재를 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나를 싱싱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 여행은 낯선 문장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일이다.


*2018년의 태풍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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