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남 시인



농담의 온도


농담은
물을 머금으면 장대비가 되고 해를 머금으면 양떼구름이 된다
양떼구름 아래서는 천 년을 피어나는 해바라기가 되지만
장대비 내리는 하늘에서는 입술을 떠나온 말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농담은 듣는 사람들의 공기층을 두껍게 한다

불안전한 대기는 예측이 어렵다

나는 지금 벼랑이다 벼랑은 뾰족한 부분이 대부분이라 떨어지면 치명상이다
가깝다는 건 가슴까지 재는 거리, 가슴의 자리가 다른 사람들끼리 앓는 구름대가 지표면을 달군다 불붙은 꼬리처럼 금방 터지는 비명이 낯빛을 바꿀 때 농담은 지반이 약한 쪽이 먼저 무너진다

중략

온도차에 부딪히는 공기들이
헛짚은 허공의 손으로 떨어지는 비를 받아낸다
손우물이 깊지 못해 산사태가 밀려올 것 같은
농담은 관계를 들어 올리는 나만의 환청인가

임경남 시인의 <기압골의 서쪽을 맑거나 맛있거나>중에서 발췌

말은 마음이 비추는 거울이다. 필요할 때 필요한 말만 하며 사는 사람은 실수는 덜 하겠지만 자칫 사람사이가 건조해지기 쉽다. 농담은 건조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가슴에서 재는 거리가 적당해야 농담이 농담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법이다. 말만 잘하는 사람에게는 사기꾼 냄새가 나고 말도 잘 하는 사람은 주변이 늘 따스한 봄날이다.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한 마디를 얹어두고 말의 그네에서 내릴 수 있다면 그건 예술이다. 하지만 종종 말이란 내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오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되어지기도 한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어 말에는 엑셀레이터 기능 보다 브레이크 기능이 더 뛰어나야 한다. 삶에서 말 한마디란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천 냥 빚을 늘리기도 하는 양날의 칼이다.

가슴의 자리가 다른 사람끼리 나누던 농담 한 마디에 얼굴을 붉힌 사건이 있었다. 나는 A라고 말했는데 그가 B라고 받아들인 것이다. 비슷한 공기층이었다면 장대비는 내리지 않았을 텐데 어쩌면 농담 이전에 서로에 대한 마음의 기압골이 고르지 못한 게 더 큰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이 시가 나에게로 왔다. 내 마음이 자라고 나면 같은 말도 다르게 들리는 법,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니 뾰족하게 반응이 왔어도 둥글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내 마음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불붙은 꼬리 같은 건 생겨나지 도 않았을 일이다. 생각의 파장이 맞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맛은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맛이고 멋이다. 말의 재료가 생각에서 얻어진다면 서로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게 말의 맛이다. 글맛이 맞는 책을 읽고 나면 내 무의식에서 기름진 글 한편이 불려나오듯 말맛이 맞는 사람을 만나 말의 그네를 신나게 타고 돌아오는 날에는 내가 풍성하게 존재 하는 것 같아 들뜨기까지 한다.

말은 인생의 무기다. 그러므로 말을 잘 다스리는 일은 내 생각을 잘 다스리는 일이다. 생각의 부재는 언어의 부재로 이어지고 언어의 부재는 존재의 부재로 이어진다. 결국 말을 쓰는 방식은 삶에 닿아 있는 것이다. 어느새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말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말을 잘 다스리려고 오늘도 책을 읽는다. 말의 잔재주는 늘었어도 마음을 다스리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이 가을, 말馬이 살찔 게 아니라 말言이 살찌는 계절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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