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남 시인


빈 집


야반도주의 목록은 빚이거나 애정이거나

시골 옆집은 20년 째 빈 집이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궁리가 깊어지는 담장은
기름 냄새와 막걸리로 자주 인심을 부풀렸다

아무도 모르는 야반도주가 꿈틀거리던 그 밤을 마당 안쪽 감나무는 다 지켜보았을 것인데

애정이 식은 빈 집은 허물어지기 좋아
아랫목까지 풀꽃이 차오르면
빚을 맡기기에도 든든했겠지

감나무는 시치미를 떼느라 해마다 푸른 혈서를 내 걸고 견뎠을 거야

중략

새우등처럼 굽은 저녁이 오면
빈집은 마을의 오래된 구멍이 된다
이제는 미움도 낡아 망초꽃만 담장을 넘고 있다

임경남 시집<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에서 발췌


시골의 밤은 일찍 온다. 이른 저녁을 해먹고 산책을 하다가 멀리서 바라본 시골집은 군데군데 불이 꺼져 있어 구멍처럼 보였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빈집은 마을의 오래된 구멍이다’라는 문장이 떠올라 이 시의 중심 소재가 되었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시댁동네도 인구소멸지역을 실감나게 한다. 비좁은 골목에 바글바글했던 아이들은 자라 다 도시로 떠나고 부모님은 집과 함께 낡아가고 있다. 어느 해인가 캄보디아 여행지에서 아주 오래된 유년의 풍경을 만난 적이 있다. 흰 머릿수건을 쓰고 긴 광목 앞치마를 두른 젊은 엄마가 어린 나를 부르러 나올 것 같은 기시감에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했던 마음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곳에 올망똘망한 아이들의 무리 속에 흙 뭍은 추억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엄마아빠 세대들의 젊은 시절 취향을 발견해낸 mz세대들이 ‘뉴트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소비에 앞장서고 있다. 우리시대의 추억을 소환해서 새로운 감성으로 해석해내는 그들의 문화가 신선하다. 고향이란 내 감성의 胎가 발현되어 완성된 곳이다. 그곳에서 느꼈던 슬픔과 기쁨은 어른이 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하루하루 날짜로 넘어가는 도시 생활과 달리 계절별로 지나가던 그 시절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는데 어른이 된 지금은 기와집과 마당과 집과 집을 연결해주던 굽은 골목길들이 내 유전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다. 오래된 것들과는 무조건 결별하고 모던한 것만 찾던 젊은 날을 지나 이제는 다시 내 유전자가 끄는 대로 살아보고 싶어진다. 때 마침 서까래 있는 빈 집을 수리해서 살아가는 5도2촌의 브이로그가 유튜브에서 한창 성업 중이다.

나에게 찾아온 이 욕망을 올해는 본격적으로 들여다보았다. 단순한 아파트 생활을 잠시 벗어나 햇빛 소나기를 흠뻑 들이키며 정원을 가꾸는 일, 책 몇 권과 노트북을 가지고 혼자살기를 해보는 일, 이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①내가 사는 곳에서 두 시간 안 쪽일 것 ②100평에서 150평 ③마을과 좀 떨어져 있을 것. ④00예산에 맞출 것. 하고 싶은 것들을 상상만 할 게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현실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여행의 시작이란 준비하는 순간부터이듯 나의 5도2촌도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 또다시 일상을 여행으로 만들어 보는 일, 마을의 오래된 구멍을 찾아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로 한동안 나는 싱그럽게 살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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