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남 시인


겨울밤

호롱불 일렁거리던 밤이었어요
연필에다 침을 꾹꾹 발라가며 숙제를 하는 동안
뒷산 시누대 일렁이는 바람소리 마을의 무릎까지 차올랐고요
또당또당 방안 가득 무 썰던 엄마의 도마소리
어린 나를 기워가고 있었지요
아무리 살아내도 수북한 외상값 같은 젊은 날의 엄마를
숙제장 뒤편에다 받아 적으며 나는 자주 체기에 시달리곤 했어요
가끔 쪽진 외할머니 오셔서 초저녁잠에 들고나면
코 고는 소리 기와지붕을 들썩거리게도 했는데
부엉이 깊이 울어 새벽을 흔들어대면
도란도란 모녀지간의 이야기 잠든 우리들의 머리맡을
흥건하게 적시기도 했지요
호롱불도 외할머니도 모두 전설이 되고
무말랭이처럼 줄어든 엄마는
숙제 장 뒤편에 받아 적게 했던 적막을 지금까지 데리고
하강 하는 중이예요
아무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 없었지만
저온에 입은 화상처럼
자꾸만 물집이 잡히던 겨울밤이었어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 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이 글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중에 유명한 첫 문장이다. 자고 일어나 커튼을 열어젖히자 딱 그 장면이 펼쳐졌다. 물론 유자와(설국의 배경도시) 만큼 눈이 쌓여서는(2미터이상) 큰일 날 일이지만. 그 많던 새소리는 어느 봄으로 돌아갔는지, 수묵화처럼 고요한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봄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문고리가 쩍쩍 달라붙던 어린 날의 겨울은 밤이 길어 엄마의 옛날이야기는 진작 바닥이 났다. 그때 쪽진 외할머니 오셔서 ‘니 에미 어렸을 때’로 이야기는 다시 이어지고 겨울밤은 더욱 꽝꽝 얼었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자꾸만 물집이 잡히던 유년의 겨울밤이 먼 시간을 건너와 한 편의 시가 되었다.

호롱불도, 외할머니도, 엄마도, 어린 나도 지금은 모두 전설이 되었다. 이 기억의 흑백사진 한 장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 같다. 내 안에는 참으로 많은 내가 들어 있다. 흑백사진에서 오는 쓸쓸함도, 가끔 찌질해 지기도 하고 가끔 괜찮아지기도 하는 내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나를 밀고 가는 것이다. 마침, 독서를 통해 소란스러운 내면을 다스리는 일은 썩 괜찮은 선택이었다. 아침 설거지를 끝내고 커피 한잔 들고 서재로 출근한 나는 이 적요함 속에 바깥 풍경과 내 내면의 풍경을 함께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다. 행복에는 기쁨만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반짝이는 슬픔도 들어 있어야 제대로 간이 맞다. 슬픔을 반짝이게 하는 일, 생각을 바꾸는 일에는 독서가 최고다.

마침, 이번 주 독서 모임은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었다. 이 책의 주제가 되는 ‘글 잘 쓰는 방법’은 기,승,전, 독서다. 글쓰기는(독서), “기능이고 근육이고 티끌모아 태산이다”라는 말에 처음 운전 하던 때가 떠올랐다. 방향지시등은 켜 놓고 망설이던 내게 뒤차는 빵빵거리지, 가슴은 콩닥거리지, 결국 차선변경을 못해 길을 놓쳤던 경험,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감각적으로 운전한다. 기능이란 그런 것이다. 독서가 좋다는 것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어, 수학은 큰돈을 들여 학원에서 훈련시키면서 독서는 왜 훈련 하지 않는가? 그건 글자를 알면 독서도 저절로 되는 줄 아는 착각 때문이다. 긴 겨울밤, 호롱불 같은 알전구를 켜고 책을 읽는다면 엄마로부터 시작되어 외할머니로 이어지다 끊어진 이야기를 내가 다시 연결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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