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남 시인

손 없는 날


로봇 청소기가 벚꽃의 뒤축을 따라다니고 있어
먼지 대신 꽃잎을 털어먹은 청소기가 속도를 피우는 밤

립스틱의 뿌리는 내 입술이야
입술을 지나온 말들이 웃음의 사각지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그날의 키스는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 낡은 입술의 날들은 버려야해
결혼사진도 백과사전도 이십년이면 다 유물이지
남아 있는 손자국과 발소리까지 다 신고 가야해
텅 빈 공간이 주인이 될 때
먹먹한 어둠의 보관 장소는 장롱이 최고 였지
햇빛을 넉넉히 가진 나는 소소한 화분들과 광합성의 지분을 나눠 갖기로 했어
활짝 핀 해바라기 액자에 내린 뿌리들을 털어내야 하거든
숨겨진 시간만큼 숨은 벽은 되돌려 주어야 해

중략

손 없는 최고의 날 이었어

임경남 시집 <기압골의 서쪽은 맑거나 맛있거나>에서 발췌

내가 나고 자란 유년의 집은 내 몸에 새겨진 뿌리다. 그 뿌리는 때때로 이곳 고층아파트까지 찾아와 나를 출렁거리게 한다. 결혼하고 마련한 첫 집의 설렘은 또 어떤가? 쉬는 날마다 찾아가 뼈대만 있는 1층 2층 3층을 손꼽으며 우리 집을 가늠했던 그 시절도, 첫사랑과도 같은 그 집과의 이별도 이제는 젊은 시간을 지나 옛일이 되었다. 지방에서 살던 내가 남편의 일 때문에 서울권으로 이사 하게 되었을 때 이사를 재주껏 잘 해 부자가 된 친구가 말했다. 서울 생활이라는 게 어디에다 짐을 푸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고. 나는 그때 자본주의적 사고를 갖지 못해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몇 번 집을 사고팔았지만 운명을 바꿀 만큼은 아니었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이 가까이에 많이 생겨났다. 10억이 넘는 집이 예사로 생겨났지만 어찌된 일인지 전보다 더 가난을 느끼는 것 같다. 지금의 가난은 집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동차가 없어서가 아니라 어느 동네에 집이 있는지 어떤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가난의 질량이 달라진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배가 아파서 가난한 것이다.

 올 3월에 아주 겸손 한 동네, 아주 겸손 한 가격대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서재 밖으로 야트막한 산이 있어 뻐꾸기도 매미도 풀벌레 소리도 다 라이브다. 새벽에 일어나면 새소리가 얼마나 발랄한 지 내 귀를 숲 속에 던져놓고 아침 준비하는 날이 많아졌다. 전원생활을 하고 싶었던 나에게는 이 집이 딱 이다. 창밖에 한 무리의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서재 의자에 묻힌 나도 같이 떠내려가는 느낌이다. 일상이 여행이 되는 순간이다. 역세권을 시작으로 스벅권, 맥세권 숲세권, 공원권, 초품아...... 참 많은 수식어들이 아파트와 함께 생겨났지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숲세권이다. 계절에 따라 풍경이 바뀌는 일은 내 몸에 새겨진 유년의 다른 장면 하나씩을 꺼내 갈아입는 일이다. 책을 읽다가 무심히 숲을 바라보면 덩달아 싱싱해 지는 기분, 그러므로 나는 아침마다 새롭게 리셋된다.

 미친 듯이 상승하던 아파트값이 폭락하고 있다. 절정의 더위에 반드시 가을의 씨앗이 들어 있는 것처럼 폭등에는 폭락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우 상향 하는 것이 또한 자본주의의 법칙이다. 영끌로 집을 산 젊은이들이 높은 이자에 허덕인다는 뉴스가 들린다. 인생이란 개인의 재능이나 성실성만으로 결정 되는 게 아니라 시대라는 날줄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젖은 발등을 말리며 따스하게 뿌리를 내리는 게 집의 본질인데 언제부터인가 집은 격차가 되고 말았다. 한류가 대세라지만 그 이면에 무엇이든 경쟁해야 하는 우리들은 끝없이 피로사회에 시달린다. 이럴 때 일수록 중심을 내부에 두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다. 세상에는 나 보다 돈 많은 사람,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수두룩하니까. 오죽 하면 ‘행복’의 반대말이 ‘비교’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시대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기에  우리들은 지금 여기에 가지고 있는 재료들로 인생이라는 맛 나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날마다 ‘손 없는 최고의 날’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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