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도 살고 참깨도 사는 길 / 고재종

텃밭에 참깨씨를 뿌려놨더니
참깨순 쑥쑥 올라온다. 오르는데
요런 요망한 두더지들이
땅 밑으로 이 길 저 길 내는 통에
참깨 순 다 죽는다. 다 죽어선
어디 한번 해보자, 전쟁을 선포하고
그놈들 잡겠다고 골머리를 싸매지만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더더욱 낮만 아니고 밤에도 길을 내니
요령부득이다, 요령부득인데
옆집의 쭈그렁 꼬부랑 할머니
그놈들 지나가 흙 부푼 길목 길목에
대꼬챙이를 박아두란다, 박아두었더니
신기하게도 더는 길을 내지 않는다
하도 희한해서 이유를 여쭈니
그놈들은 눈이 어둡당께/ 주둥이만으로 길을 뚫는당께,
주둥이가 부딪치니 지가 워쩔 것이여!
그러나저러나, 그러면 그놈들은
이제 어디로 길을 낼 것인고 했더니
다 저 살 길을 뚫는당께,
저도 살고 참깨도 사는 길을 뚫는당께,
길을 뚫는다고 해서 다 길이 아니랑께!
그 말을 알아들은 듯 나보다 먼저
참깨 순은 마냥 일렁이는 게 아닌가.

<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어렵사리 농삿군이 되어 힘들게 농사를 짓다 보면 의외로 괴로힘을 당할 때가 많다.
눈이 예쁜 고라니가 온통 밭을 짓이겨 놓을 때도 그렇고, 멧돼지들이 올망졸망 귀여운 새끼들까지 데리고 와서 고구마밭을 완전 작살 내놓을 때도 그렇다. 참 약이 오른다. 게다가 땅 밑으로는 두더지 녀석까지 애통 터지게 한다. 물 뿌리고 퇴비 주고 벌레 잡아서 겨우 작물을 살려 놓으니까 뿌리 밑으로 다니며 온갖 작물을 말려 죽이니 그 두더지가 얼마나 얄미운가 말이다. 전쟁까지 선포하고 나섰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다. 이길 재간이 없다. 경험 많으신 할머니가 묘안을 주신다. 그 처방인즉 두더지 다니는 길목에 대꼬챙이만 몇 개만 박아 두란다. 미덥지 않지만 그대로 시행해본다. 그런데 우째 이런 일이… 시들거리던 참깨가 사알살 고개를 든다. 신기하다. 말라 죽어 가더니 쭈뼛쭈뼛 살아나고 있다. 두더지의 섭생을 아는 쭈구렁 할머니는 같이 상생하는 방법을 넌지시 던져 주신 거다. 흙을 만져보고, 벌레와 눈도 마주쳐 보고 두더지와 말도 해본 할머니는 그들이 말하는 소리도 듣는다. 길을 내주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인정해주는 것이 같이 사는 지혜임을 젊은 농삿군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더지도 살고 참깨도 사는 길’이 있었던 것을…비로소 어른에게 배운 것이다. <박모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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