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숙 작가

▲ 윤명숙 작가
또 한 해가 허락 없이 달려간다.
몇 날 남지 않은 숫자들을 보며 초조함마저 든다.
올 한 해는 뭘 했지, 어떤 일을 해냈을까.
갑자기 반성과 후회가 쓰나미처럼 나를 할퀴었다.

누구나 첫사랑은 있었을 테다.
내게도 갓 스물 쯤 글로만 보던 사랑이 찾아왔다. 내 생에 첫사랑은 배신으로 시작했다.

여자 형제 없이 독학으로 배운 사랑은 설렘과 기다림 그리움이 동반되어야 했다.
나를 좋다고 따라다닌 복학생 오빠가 내 생애 처음으로 내 아버지 오빠들을 제외한 첫 다른 집 사람이었다.
신입생이 된 나는 어울리지 않은 통굽 구두를 후들거리며 신고 다녔고, 그런 내가 안쓰러워 주머니를 털어 스니커즈 운동화를 사준 오빠, 커다란 봉제 곰이 갖고 싶다고 스치듯 말했는데 자기보다 큰 덩치의 곰을 안고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졸업여행을 핑계 삼아 포항으로 달려왔다 난 그저 이런 게 사랑인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어느 날 친구가 남자 친구 만나러 가는데 함께 가자고 했다.

어제처럼 아직도 생각나는 그날은 초록이 막 푸르고 개나리가 만개했다. 찻집 문을 열고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친구 오빠와 처음 보는 낯선 오빠를 발견했다.
간단히 인사하고 일상처럼 대화가 무르익고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지만 알 수 없이 가슴이 쿵쾅거리고 속까지 메스꺼웠다.

눈물로 호소하는 복학생 오빠에게 가슴이 뛰지 않았다고 고백했고, 그렇게 가슴 뛰고 보고 싶고 기다려지던, 안 보면 죽을 것 같았던 그 사랑도 졸업 무렵 끝이 났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예순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직 내 사랑은 미숙하기 짝이 없고 아주 작은 바람에도 상처를 받는다. 남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는 사람이 정작 나 자신을 학대하고 있는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얼마만큼이 시간이 내게 주어져 있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시간을 허투루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내게 고통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고통을 주문했던 것 같다.
이걸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고통이 내게 성장이라는 기회를 주는 것 같아 그 고통마저 감사하다.

이불을 박차고 미친 듯이 노트북을 열었다. 새해에 할 일들과 지난 2년 동안 미뤄뒀던 일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궤도 수정을 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자신을 위로했다. 잘했어, 잘할 줄 알았어! 그래, 그러면 된 거야.

수십 년 전 뛰었던 가슴, 속이 메스꺼운 것 같았던 그 희열, 달라져 있을 내일의 내 모습 이 나이에 비로소 홀로서기에 성공한 것 같다. 첫사랑 같은 새해가 너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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