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전경

   
▲ ◆학도의용군 그들을 기억하다 전시 공간

   
▲ ◆6,25 전쟁사 및 학도의용군 역사 공간

   
▲ 학도의용군 활약상 ‘11시간의 용기’ 전시 공간

   
▲ ◆625 전쟁 당시 국군과 학도병이 사용했던 82㎜ 박격포와 3.5인치 로켓발사기

   
▲ ◆6,25 전쟁 당시 참상을 보여주고 있는 주인없는 철모와 탄피

   
▲ ◆권정열 대한민국학도의용군포항지회장 겸 전승기념관 명예관장

   
▲ 추모 공간

   
▲ 전승 기념관 2층 사진 전시실

본지는 최근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6·25 전쟁 당시 나라가 바람 앞의 등잔불처럼 위태롭던 시기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조국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다”라는 한 장의 격문을 보고 포탄이 쏟아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터로 향해 어린 나이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을 지켜낸 학도의용군의 활약상을 살피고 당시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한 노병의 증언을 듣기 위해 포항시 북구 용흥동에 위치한 전국 유일의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을 찾았다.


◇학도병 정의 및 정신 유래

학도병이란 6·25 전쟁 당시 학생신분으로 전투에 참가한 사람을 말한다. 학도병은 입대해 군번과 계급을 받기 전까지는 학생의 신분이므로 '학도의용군'이라 했으며 이들은 학생들만의 독립된 조직으로 단위부대를 구성해 활동하기도 했으나 비정규군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군번과 계급을 받아 전투부대에 배치돼 학도병이라 불리었던 정규군이다.

학도병은 당시 대부분 중학교 재학생으로 입대 모집 공고문을 보고 개별적으로 현지 입대를 지원하거나 학교장과 배속장교의 입대 권유를 받고 단체로 지원하는 등 위기에 처한 조국을 위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또 상당수의 여학생들은 간호원으로 참전했다. 당시 학교교육제도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6년 과정과 중학교 4~6년 과정, 대학교 4~6년의 과정이 있었다.

학도병의 정신은 화랑도 정신, 호국정신, 상무정신에서 유래됐다. 먼저 화랑도 정신은 신라시대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구법하고 귀국한 후 화랑 귀산과 추항이 찾아가 일생을 두고 경계할 금언을 청하자 원광이 오계를 주었다고 한다. 즉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이다. 이는 화랑도의 신조가 돼 신라가 삼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다음은 호국정신으로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죽어서라도 동해의 해룡이 돼 일본의 침략을 막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보여 준 것으로 백성에게 호국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마지막으로 상무정신은 고구려가 농경국가로 무력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무력에서도 강국이었다. 이는 고구려의 무예를 숭상하는 상무정신에 비롯된 것이었다.

◇학도병 주요 전사

학도병들은 국군 10개 사단과 그 예하부대에 편입돼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방어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국군 제3사단 예하 22연대와 26연대, 국군 제1사단 예하 15연대는 1950년 7월 중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보충병의 대부분을 학도병으로 충원하고 동년 8월 초순 대구에서 새로이 편성된 국군 25연대도 병력의 대부분을 학도병으로 충원했다. 이들 부대에 들어간 학도병들은 기계·안강지구, 칠곡 다부동, 영천지구, 포항지구 등 여러 전투에서 수많은 희생으로 조국 수호의 초석이 됐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1950년 8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 낙동강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전투를 말한다. 적에게 국토의 95%를 빼앗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낙동강 방어선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북한군은 해방 5주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목표와 자신감으로 전쟁에 임했기에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쌍방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피의 전장이었고 낙동강은 피로 물들어 갔다.

당시 아군 9개 사단은 천혜의 지형장애물인 낙동강 160Km와 동해안 산악지역을 이은 80Km를 연결하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 13개 사단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고 칠곡 다부동, 기계·안강, 영천지구, 포항전투 등에서 승기를 잡았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치열했던 공방전에서 전쟁의 판도를 수세에서 공세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고 6·25 전쟁의 전세를 뒤엎은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군의 지속적인 증원과 가슴에 조국을 품은 학도병들의 고귀한 희생이 큰 몫을 했다.

지역에서 학도병이 참가한 대표적인 전투로는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에서 71명의 학도병이 M-1 소총 한 자루와 실탄 20~250여 발로 군의 지휘도 지원도 없이 11시간의 긴 사투 끝에 48명이 전사하는 처절했던 전투가 있다. 참전 학도병들은 서로가 고향도 학교도 이름도 몰랐다. 이들의 처절했던 전투는 전사에 기록돼 있고 현충비, 충혼탑, 전적비 등에 전적을 담고 있다. 특히 영화 '포화 속으로'에서 소개돼 전후 세대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전해주기도 했다.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한 노병의 증언

6·25 전쟁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던 이석수(92세·전 경북도 정무부지사)옹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전쟁 당시 이 옹은 포항 동지중학교 4학년(15세)이었다.

"우리가 중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이 있어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우리는 평상시처럼 학교에 다니면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때는 아직 포항까지 적이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7월 17일쯤 아침에 학교에 가서 조회를 하는데 3학년 이상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키가 큰 애들만 선별해 100여명이 트럭 3대에 나눠 타고 전선으로 떠나고 나는 그냥 고향에 남아 있다가 8월 13일 가족들과 구룡포로 피난을 가다가 국군들한테 강제 징집을 당해 3사단 23연대에 배치를 받고 공병대 보급담당 부서로 배속됐다. 임무는 지뢰제거, 적 보급품 확보 등이었다. 부대 배치를 받은 후 치열했던 영덕 장사상륙작전이 끝나고 적 보급품 확보를 위해 부대가 투입됐는데 상륙작전에서 우리 학도병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척 아팠다. 부대는 다시 동해 바닷가를 따라 북진을 하면서 적군과 교전을 하고 지뢰도 매설하면서 다리를 폭파하기도 했다.

우리 부대는 원산을 지나 흥남을 지나고 두만강까지 진격했을 때는 곧 통일이 될 거라고 모두들 들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1950년 10월 말부터 중공군이 개입되면서 상황은 역전이 되고 국군과 UN군은 흥남부두를 통해 남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흥남에서 철수한 우리 제3사단 23연대는 강원도 인제 지역에서 주둔을 하게 됐다. 이듬해 2월 학도병을 임의 조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 근거는 이승만 대통령의 학도병 복교령이었다. 따라서 참전용사 귀환증을 받아 강제 징집 8개월 만에 고향집 포항으로 돌아와 대학을 졸업하고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지만 군번이 없었던 이유로 다시 군에 입대를 했었다."

◇전국 유일의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

6·25 전쟁의 역사와 조국을 위해 희생한 젊음의 혼이 살아있는 전국 유일의 '학도의용군 전승기념관'은 포항지구학도의용군회의 애국애족 이념과 포항시 등 각계의 노력으로 2002년 7월 28일 포항시 북구 용흥동 현 위치에 건립됐다. 규모는 부지 4062㎡, 연면적 903㎡ 지상 2층 건물로 1층은 전시실, 2층은 사진 전시장 및 시청각실로 구성돼 있으며 기념관 뒤편 탑산에는 전몰학도 충혼탑과 포항지구전적비가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1층 전시실에는 △학도의용군 그들을 기억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 △조국을 지켜야 한다 △11시간의 용기 △그들의 넋을 기리다 주제로 5곳의 전시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학도의용군의 애국애족, 희생, 구국 정신을 살펴볼 수 있고, 6·25 전쟁 당시 사진과 전시품을 통해 현실감 있는 전쟁사와 학도의용군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또 포항을 비롯한 경북지역 치열했던 전투 중 학도의용군 단독 전투인 포항여중 전투에 대한 설명과 전투 모형물 등이 전시돼 있어 학도병들의 용맹함과 희생정신을 엿볼 수 있다. 추모공간에서는 군번도 계급도 없이 낙동강 최후 방어선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학도병들의 위대함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다.

권정열 대한민국학도의용군포항지회장 겸 전승기념관 명예관장(사진)은 "6·25 전쟁 발발 어언 74주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휴전 하에 남과 북이 대치하면서 긴장과 위협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본인도 6·25 전쟁 당시 고향 포항에서 동지상공중학교 2학년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해 전장의 참혹함을 몸소 겪으며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고 이렇게 살아있지만 당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과 싸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낸 국군과 유엔군 그리고 학도병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며 "현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6·25 전쟁에 대한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호국선열들이 피로 지킨 이 땅과 그 정신을 보존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정에서부터 어른을 공경하고 스승을 받드는 인성을 우선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인성이 우선돼야 개인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정신과 행동이 표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정이나 학교에서는 지식도 중요하지만 모든 교육에서 선행돼야 할 교육은 인성교육이다는 점을 꼭 명심해 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한편 천만석 포항시 북구 용흥동장은 "6·25 전쟁 당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신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에 삼가 고개 숙여 감사와 고마움을 표한다"며 "제가 동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용흥동에 호국영웅들의 전승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에 동민들과 함께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앞으로 호국영웅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계승해 지역과 국가발전을 위해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자료 제공=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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