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세종대 교수

세계를 다니다 보면 내가 일고 있는 사실이 얼마나 미천한 것인가를 다양한 점에서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세계가 일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국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주변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영국의 금융 경제, 왕실 부동산 등에 대해 논의하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영국은 아니지만 영국 왕실 소속의 섬나라 자치정부가 있고 이런 곳이 조세 회피처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몰랐던 독특한 곳이어서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이곳을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과 비용 등 고려되어야 하는 상황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스코틀랜드를 가려는 세일링 계획이 바뀌면서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그 섬을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건지섬(Bailiwick of Guernsey)이다. 이곳은 공식적으로 영국왕실에 소속(Crown Independency)된 곳이다.

건지섬에 도착하자 내 영국 핸드폰이 외국으로 인식하여 데이터를 사용하도록 요구하였다. 이곳은 영국 왕실 소속으로 1926년부터 공식적으로 영어를 사용하지만 그 전에는 프랑스어나 지역적 특색을 가진 norman french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곳은 영어보다 프랑스어와 유사성이 더 많은 건지어가 따로 있다. 건지어를 어린이에게 학습 시키기 위한 책도 판매하고 있다. 건지는 자신만의 법과 정부도 있지만 완전 독립국은 아니다. 영국이 1973년 유럽연합에 가입했을 때 건지는 이에 가입하지 않고 특수 형태로 남아 있었다.

건지를 소개하는 책자에는 이곳이 유명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영국의 100대 기업 중 40%가 이곳에서 영업하면서 보험금을 절약하고 있다. 해외에서 엔지니어 등 전문가로 일하는 사람은 이곳에 투자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곳은 법무법인이나 회계법인을 통해서 특수목적 법인 또는 신탁사를 설립하고 그런 회사나 신탁사를 통해서 다른 곳에 투자하는 형태로 활용된다고 한다. 건지는 법인세도 없고 양도세도 없고 원천과세도 없다고 하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데 자세한 면모를 이해하기에는 걸림돌이 너무 많았다.

2008년 기준으로 50개의 은행과 1000개 신탁사가 건지섬에 기반을 두고 영업을 하면서 부를 창출하고 있고, 자산운용 회사와 주식, 보험사 등도 많이 있어서 고용의 2/3가 이런 기업들에 의해 창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이곳이 조세 회피처로 유명세를 타지만 건지는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87년 건지는 금융업을 정비하여 돈세탁을 반대하는 법을 만들어 국제적으로 검고 부패한 돈이 이곳에서 불법적인 이득을 얻는 것을 방지하는 규칙을 제정하였다. 그 말은 역으로 그 이전까지는 훨씬 자유롭게 국제적으로 검은 돈이 들어와 깨끗한 돈으로 세탁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워낙 조세 회피처로 유명세를 타다 보니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이미지 쇄신을 하려고 하고 있지만 여전히 자금이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는 많은 기반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이 섬을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일주해 보았다. 아름답고 넓은 해변이 곳곳에 펼쳐져 있고 파도가 세게 들이치는 것도 아니고 놀기 좋은 정도의 깊이로 다채로운 푸른색을 띤 바다가 펼쳐져서 휴양지로 휴식하기에 좋은 곳으로 보였다. 섬 전체를 해안 일주로와 중간을 가로지르는 도로로 다녀 보아도 전체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사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섬도 세계사적인 전쟁에 관계되어 상흔을 입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프랑스 쪽에 근접해 있지만 1259년 파리 조약으로 영국 소속이 확정되었다. 그후로도 부침이 있기는 하였지만 당시 헨리 3세(Henry Ⅲ)가 그의 아들에게 또 에드워드 1세(Edward Ⅰ)로 내려오면서 왕실 소속으로 남게 되었다. 건지섬의 샌피터항(st. peter port)은 1206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1260년에는 확실하게 완성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 후로 800년간 건지섬의 코넷 성(Cornet Castle)이 중요한 역사적 장소가 되었다. 코넷성에 들어가면 신석기 청동기 시대부터의 설명과 역사적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세계 제1차와 제2차 대전시의 역사에 대한 설명도 포함되어 있다.

1940-45년까지 이 섬을 점령했던 독일은 이곳을 영원히 통치하기 위해 각종 요새들을 많이 쌓았고 거대한 지하 병동도 만들었으나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게 지어진 지하 병원은 적어도 500명 이상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1944년에 3개월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했다고 한다. 독일이 다양한 민족을 동원하여 튼실하게 만든 요새는 섬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이 섬에는 르노와르(Renoir)가 와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인 빅토르 휴고(Victor Hugo)가 나폴레옹 3세의 폭압 정치에 반대하여 14년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던 곳이다. 빅토르 휴고는 이곳에서 사는 동안 유명한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를 완성하였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영국 런던 뮤지컬 극장에서 가장 오랫동안 상연되고 있는 뮤지컬의 대명사가 된 작품이다. 건지섬을 보면서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고 세계는 여전히 넓다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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