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스포츠를 좋아했다. 1970년 초반, 마을에 두 대밖에 없었던 TV가 운 좋게(?) 우리 집에 있었던 덕이다. ‘여로’ 등 연속극도 재미있었지만 무하마드 알리, 조지 포먼, 홍수환, 김일, 천규덕 등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들의 중계방송이 더 기다려졌다.

스포츠 중계방송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게임의 법칙(룰)을 알게 됐다. 권투는 싸움과 다르고, 동네축구에서 간혹(?) 통하는 떼쓰기가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김일 아저씨의 전매특허인 박치기에도 어느 정도 룰이 있었다. 권투선수들이 죽어라고 상대방을 때리고도 경기가 끝나면 서로 격려하며 끌어안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멋있게 보였다. 나중에 그것이 스포츠맨십이란 것을 알았다.

70년대엔 국가대표 간 축구경기에서도 심한 반칙 때문에 간혹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동네축구판은 아예 난장판 싸움으로 끝날 때가 많았다. 마을대항 축구는 싸움판으로 변질되기 일쑤였다. 심판은 있으나마나였다. 어린 마음에 ‘다 큰 어른들이 왜 저러나’라고 한심하게 바라봤다.

스포츠맨십은 남의 나라 얘기고,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겼기 때문에 악을 쓰고, 싸움 구실을 찾느라 눈을 희번덕이는 형들이 많았다. 항의하다 성에 차지 않으면 판을 엎는 사람들이 득세하는, 스포츠맨십이 실종된 동네 스포츠 현장이었다. 지금은 생활체육이 제도화됐고, 페어플레이정신이 강조되면서 동호인 대회에서도 스포츠 폭력은 거의 사라졌다.

스포츠맨십이란 말에서 보듯이 스포츠의 속성은 정정당당함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스포츠가 상업화되면서 엘리트 스포츠에서 부정과 불법, 편법, 일탈 등 스포츠맨십과 거리가 먼 일들이 빈번히 일어난다. 국내 스포츠계도 승부조작, 심판매수 등 사법처리 사안은 물론이고 편파판정, 눈속임, 악의적 플레이, 금지약물 복용 등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스포츠 현장을 오염시키고 있다.

‘공정한 스포츠’란 명제는 체육철학 분야에서 자주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지구촌 모든 스포츠맨들이 룰을 지키고, 상대를 배려하며,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승부를 가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스포츠가 자본과 결탁하면서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맨십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최근 스포츠맨십의 좋은 사례가 독일축구에서 나왔다. 지난 10일 독일 프로축구 2부리그 보훔의 주장 바스티안스가 다름슈타트의 페널티지역으로 돌파하던 중 주심이 수비수의 반칙을 지적하며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보훔이 0-1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승부의 균형을 이룰 절호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바스티안스는 주심이 달려와 묻자 “수비수와 접촉이 없었다”고 솔직히 시인해 페널티킥은 취소됐다. 바스티안스의 보기 드문 ‘양심선언’에 양 팀 감독 모두 찬사를 보냈다. 바스티안스의 정직함에 대한 보상인지 보훔은 후반 2골을 넣어 2-1로 역전승했다.

바스티안스는 “프로축구의 거친 세계에서도 가능한 한 정직해져야 한다”고 말해 스포츠맨십이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그것이 독일에서 행해졌다는 게 부러웠다. 떳떳하지 못한 승리보다는 정정당당한 패배가 우대받는 스포츠 문화가 자리잡았으면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만을 추구하는 승리지상주의는 스포츠의 본질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인류를 황폐화 할 뿐이다. 스포츠맨십이 살아 숨쉬는 한국 스포츠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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