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세종대 교수

  학자들과 대화하다가 영국의 노예제가 최근에 와서야 ‘폐지’되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노예제가 21세기에 폐지되었다는 말이 사실인가? 나는 바로 각종 보도 자료와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이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되었다.

영국은 포르투칼과 더불어 노예무역에서 가장 성공한 두 국가로 평가 받는다. 포르투갈과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송된 전체 아프리카인의 약 70%의 노예를 차지할 정도여서 가장 성공적인 노예 무역 국가였다. 영국은 대서양 노예 무역을 구축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하였고, 대서양 국가 노예 소유자의 노예가 된 사람은 노예소유자 개인 재산(chattel)이 되는 것을 합법화하는 잔인한 샤텔 노예제(chattel slavery) 관행을 만들었다.

영국은 1640년에서 1807년까지 가장 주도적으로 노예무역에 앞장섰던 국가이다. 총 31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미주와 카리브해의 영국 식민지로 이송되었지만, 바다를 가로지르는 노예선의 끔찍한 공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27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점차 반노예 정서가 확대되었고, 많은 영국인과 아프리카 노예제 폐지론자들이 노예무역을 중단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07년 영국 의회는 대영제국 내 노예무역을 불법화하는 노예무역법을 통과시켰지만 이익에 눈이 먼 사람들은 여전히 법의 규제를 피해 갔고, 노예선은 영국 리버풀이나 브리스톨 항구에 정기적으로 정박했다. 1811년까지도 족쇄와 같은 노예 장비를 운반하는 것은 노예 무역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의 노예상과 자본은 노예무역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후에도 여전히 브라질, 쿠바, 미국과 같은 주요 노예제 사회의 농장으로 아프리카 사람들을 거래하는 데 관여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1834년 영국 정부는 영국령 인도와 스리랑카 등 아시아 식민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영국과 미국령에서는 노예제도를 불법화하였다.

한편 영국정부는 적극적으로 노예제를 불법화하기 위해 1833년 경제적 대가를 지불했다. 노예 해방에 따른 노예 소유자들의 자본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2천만 파운드를 책정하였다. 1833년 영국 정부의 총 지출은 4,880만 파운드였으므로 2천만 파운드 보상금은 정부 예산의 40%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고, 영국 GDP의 약 5%에 해당하였다. 이는 영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정부 대출 중 하나로 꼽힌다. 무엇을 고려하느냐에 따라 당시 2천만 파운드는 오늘날 개인 소득 증가로 계산하면 약 170억 파운드의 가치가 있고 1인당 경제 규모를 보면 천억 파운드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액수이다. 당시의 2천만 파운드는 오늘날 24억 파운드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영국은 노예 소유주를 달래는 한편 미래 세대의 시민들에게 그 대가를 지불할 책임을 지우려는 의지가 어느 유럽 국가들 보다 두드러졌다고 한다. 노예 소유주 및 기관에 대해 2015년에야 영국 정부가 부채 상환을 완료하였다. 소위 영국 노예제 폐지가 2015년에 완성된 것이다. 현재 살아있는 영국 시민이 낸 세금이 과거 노예 무역가와 노예소유주 후손들 주머니에 고스란히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영국 시민은 분노하였고, 이후 반흑인 인종차별과 사회 정의에 대한 국제적 공분이 재점화되기도 하였다.

영국 정부는 노예 보상과 관련된 채권을 받은 개인과 기업의 전체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연구자들이 노예제 폐지와 관련하여 정부 지급금을 받은 개인과 단체 4만 6,000여 곳의 명단을 작성하였다. 현재 영국의 재계 및 정계를 포함한 유력 가문들이 포함되었고, 중산층도 채권의 혜택을 받았다. 결국 그런 제도를 만들고 집행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방편으로 활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충분히 가능하다.

잔혹했던 노예제는 역설적이게도 영국 노예제 폐지의 완성을 기회로 새로운 차원에서 빗장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예제 폐지는 인간의 비참함을 악용하여 맘껏 이익을 취했던 잔혹한 행위가 종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노예제 폐지의 보상금은 노예로 팔려가 잔인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들에게 지급되어야 정상일텐데 그들에게는 한 푼도 지급되지 않았고 오히려 노예소유주의 배만 채웠다. 무엇이 역사의 정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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