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연중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모든 분야에서 끝없는 지나친 과욕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려올 수도 있다. 단 한 분야만 예외다. 그것은 발명가가 발명의 과정에서 추구하는 편리함이다. 발명가의 편리 함의 추구는 끝없이 이어질수록 좋은 효과를 불려오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좀 더 편리하게 할 수 있을까?”,“어떻게 하면 불편한 점을 고칠 수 없을까?”

발명의 시발점은 뭐니 해도 편리함의 추구이고,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는 편리함의 추구야말로 발명의 원동력이다. 편리함의 추구에는 성역도 있을 수 없다. 한 가지도 빼놓을 것이 없고 필요치 않은 부분도 없다.

비가 오면 몸이 젖는다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발명된 우산을 살펴보자. 비가 오면 가까운 동굴을 찾거나 커다란 잎을 따서 가리던 원시 사회의 경우를 생각하면 아주 소중한 발명품이다. 따라서 비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기능만 있으면 더 이상의 바랄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새로운 편리함을 추구한 것이다. 도대체 무얼 더 바란 것일까.

갈대를 엮어 만든 도롱이에서 벗어나 대나무 살과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을 처음 사용해본 사람들의 반응은 새로운 것이 가져오는 편리함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잠깐이었다. 사람들은 대나무 살과 기름종이 우산의 편리함을 깡그리 잊은 채 불만을 터뜨렸다.

“좀 더 편리한 우산은 없을까? 기름종이 우산은 쉽게 찢어지는 데다 대나무 살도 쉽게 부러지니 너무 불편해.”

좀 더 편리한 우산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드디어 비닐을 이용한 우산을 거쳐 방수 처리한 천을 이용한 우산이 선을 보이게 되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잘 찢어지지도 않고 철 살이라 튼튼하고 쓸만해.”

끝없는 편리함의 추구 결과 불편을 해소한 사람들은 대나무 살과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을 사용했을 때처럼 잠시 잠잠하였다. 하지만 비단옷을 가지면 비단 신발이 갖고 싶은 것처럼 좀 더 편리한 우산이 없겠냐는 아우성과 함께 또다시 좀 더 편리함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다 좋은데 크기가 너무 크단 말이야. 줄일 수는 없을까? 들고 다니기 편하게 작게 좀 더 만들 수는 없을까?”

가방이 큰 학생이나 만원 버스에 시달리는 회사원들은 불편한 긴 우산에 또 다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작된 좀 더 편리함의 추구는 곧 이단 접이 우산을 발명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동으로 펼쳐지는 우산까지 발명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끝이었을까. 편리함의 추구 앞에는 이 완벽해 보이는 우산에도 좀 더 편리함을 추구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우산을 차근차근 접을 수가 없다. 그냥 확 털면 모양이 잡히는 우산은 없을까?’

이 성급한 사람들의 추구는 우산에 퍼머넌트, 즉 영구 주름을 잡는 발명이 이루어졌다. 편리함의 추구는 끝이 없었고 그때마다 우산은 새롭게 변신했다. 그런데 또 여기에서도 끝이 아니었다.

삼단 접이 자동우산은 완벽한 방수 처리로 물이 스며들 염려가 없고 크기가 작아서 여성의 핸드백에도 감쪽같이 들어간다. 그뿐만이 아니다. 버튼 하나로 활짝 펴지기도 하고 일일이 손가락으로 천을 끄집어내 모양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초기의 우산에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편리함의 추구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욕심으로 발명가의 본능이기도 하다. 귀를 기울여보자. 눈을 크게 떠보자. 우산뿐만이 아니고 모든 제품이 사방에서 좀 더 편리하게 함을 요구하는 아우성이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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