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태 칼럼니스트 공학박사

요즘 세대는 만년필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지금의 60대 이상은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한 자루씩 만년필 선물을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컨버트 형식으로 잉크를 주입하는 방식의 만년필이 주를 이루었고 손에는 늘 잉크자국이 묻어있던 동년배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중학교 교복 상의 명찰 밑에 작은 주머니에 자랑처럼 만년필을 꽂고 다니며 중학생이 된 특권을 자랑하기도 했다. 예전에 중학생들이 선물로 하나씩 장만했던 파카만년필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펜촉이 금으로 코팅이 되어있다는 소문은 파다했고, 그로 인한 재미난 이야기도 많았다. 화살촉처럼 생긴 만년필 뚜껑에 교복이 구멍이 나서 찢어져도 중학생 교복 위에 만년필을 자랑처럼 넣어 다녔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당시 회자된 이야기는 지금도 기업체 강의에서 창의력 증진이라는 주제로 강의할 때 주로 소환이 된다. 내용은 이러하다. 어느 가난한 학생이 집안이 어려워 더 이상 학업을 진행할 수가 없어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돈을 벌러 가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좋아하는 화학 과목의 담당 선생님을 찾아가 감사와 하직 인사를 드리면서 금 성분을 분해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화학식을 가르쳐주며 일반 화합물에서 금을 분리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시면서 앞으로 무엇을 하든 열심히 살라는 말을 남기며 제자를 격려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고정관념에 빠져 늘 화학식만 강의했고, 제자는 그것을 활용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고정관념의 타파, 그리고 의식의 확산이었다. 당시 비싼 만년필촉으로 필기 중 대부분이 펜촉이 부러졌지만 그냥 상의 주머니에 꽂고 다니는 친구들을 회유해서 스테인레스 펜촉으로 무료 교환해 준다고 했다. 예상대로 수많은 학생들이 펜촉을 가져와서 교환해 갔고, 그 가난한 학생은 스테인레스 닙으로 교환된 펜촉에서 금을 분리해 내고 다시 그 돈으로 철 펜촉을 사고, 금촉으로 교환해 주고 해서 나중에는 부자가 되었다는 다소 황당하지만 중학생시절에 들었던 그럴듯한 이야기는 살아가는 내내 동기부여와 창의성 개발, 그리고 고정관념에 갇혀있던 틀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만년필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오랜 시간 즐겨 사용하는 애호가가 되었다.

본디 만년필이란 펜이 종이에 닿으면 내부 잉크 카트릿지의 잉크가 모세관 현상에 의해 피드로 내려오고 펜에 가해지는 압력에 따라 닙의 슬릿 간격이 벌어지며 젖어드는 방식으로 글자를 쓴다. 또한 슬릿의 간격에 따라 굵은 촉(BB), 중간 촉(M), 가는 촉(F), 미세 가는 촉(EF) 등으로 나뉜다. 주로 결재를 할 때 굵은 촉과 중간 촉이 쓰이며 평소 수첩과 노트에 기록을 할 때 주로 가는 촉이나 미세 가는 촉을 사용한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섬세한 미세 가는 촉을 선호하는데, 세밀하게 퍼져나가는 만년필의 느낌과 기술 그 촉감이 좋다. 대개 박사학위를 받으면 담당 교수님이나 지인들께서 고가의 만년필을 선물로 하는 전통도 있지만, 그 것은 아끼고 아껴서 사용한다.

대신 하나 둘 사다 모은 저가의 만년필이 5개가 넘었다. 저가라고 하지만 그래도 몇 십만 원 짜리인데, 그중에서도 비싼 것은 아껴두고 있었다. 그러다 어려운 자리에 가게 되어 그 만년필을 가방과 주머니에 챙겨 넣고 저렴한 두 개 만 책상에 두고 며칠을 지났다. 문득 생각에 가방과 주머니를 뒤져보니 3자루의 만년필이 동시에 모두 잃어버렸다.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기억도 없어, 책상과 가방, 장롱 온갖 곳을 뒤져봐도 만년필 형제들은 동시에 모두 나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노랗고 빨간색이 칠해져 눈에 띄는 저가의 만년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것을 찾는 과정에서 또 다른 무엇인가를 발견한 게 있었으니 너무나 풍족해서 쓰레기가 된 보물들이었다.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필기도구를 보며 깜짝 놀랐다. 그 중에서 대다수는 이미 유통기한이 한참이나 지나 접착력이 떨어지거나 증발해버린 것도 많았다. 너무나 많아서 무엇부터 버려야 할지 몰랐다. 오히려 그것들을 정리하려고 들었던 시간이 너무 많을 정도였다. 그것은 주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구석구석 몇 십년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술잔, 컵, 그릇, 주석 잔 등 등. 옛 선비들은 세 칸 짜리 초가에서 붓 한 자루만 있고, 살림이 구차하고 궁색해도 가난에 구애 받지 않고 평안한 마음으로 도(安貧樂道)를 즐긴다고 했다. 이런 욕심의 찌꺼기를 벌하려 아끼고 귀하게 생각하던 만년필을 데려가신가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선물 받은 고가의 만년필이 있으니 다행스럽다는 생각과 아직도 내가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방해한다는 생각이 상충하는 것이 마치 만년필의 그립감과 같았다. 강성과 연성이 한데 어우러지는 찰진 필기감 같은 그런 느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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