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영 세종대 교수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 요트 여행이 나를 위한 여행으로 여겼다. 원래 계획대로 스코틀랜드 방향으로 갔어도 새롭게 배울 것이 많았겠지만 계획이 바뀌어 남쪽으로 내려 오는 바람에 내가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자연스럽게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내심을 대원들에게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나는 요트 마리나에 도착할 때마다 피곤해도 열심히 도심지역에 나가서 그 곳의 역사와 문화를 관찰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밤새도록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곳까지 다이아몬드 박아 둔 것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감상하다가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며 동이 터오르는 새벽 시간도 지나가자 도착한 곳이 영국 서남쪽 끝에 있는 팔머스(Falmouth) 항구였다. 이곳은 자연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수심을 갖는 3번째 항구이자, 유럽에서 가장 깊은 수심을 가진 항구로서 일찍부터 해상을 장악하는 배들이 오가는 근거지였다. 바다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전략적 위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작은 섬을 지나 항구로 들어와 보니 천혜의 요새였다.

따라서 일찍부터 해상 무역이 발달한 곳으로 이곳을 통해 영국 제국주의가 전세계로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영국이 중국과 아편전쟁을 벌이기 전에 중국으로 아편을 실어 나르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출발 항구가 바로 이 팔머스 항구이다. 팔머스 항구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에는 직접적으로 아편 무역을 설명하지 않아 실망스러웠지만 영국이 세계사를 다시 쓰게 만든 항구라는 점에서 보면 특별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다.

1689년부터 1851년까지 영국 제국의 힘이 미치는 곳 어느 곳이나 우편물(Packet Service)을 실어 나르던 항구이다. 그 우편물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우편물에는 단순히 고국의 그리움을 담은 편지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제국의 이익을 확대하는데 많은 것들이 담길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팔머스 항구 한편으로는 왕의 파이프(King’s Pipe)라는 굴뚝같은 구조물이 남아 있다. 이것은 1814년 왕의 이름으로 밀수된 담배(아편)을 근절시키기 위해 불에 태웠던 상징적인 곳으로 영국 역사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영국에서는 왕의 이름으로 밀수된 아편을 근절시켰지만 그것을 중국에 판매하였고 더 큰 이익을 취하기 위한 조치로 아편전쟁까지 감행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왕의 파이프 역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무엇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되뇌이게 하였다.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1620년 영국 플리머스(Plymouth)에서 메이플라워호(Mayflower)를 타고 미국으로 간 이민자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는 당시 영국 성공회의 종교적 박해를 받은 청교도(Puritan)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에 정착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청교도들은 미국에 정착하여 얻은 첫 수확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이다. 미국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청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나서는 역정은 현재까지도 미국이 자유 국가를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테마이다.

미국에 있는 플리머스에 가면 영국인이 도착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 민속촌처럼 만들어 둔 곳이 있어서 당시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미국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이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메이플라워호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 출발점인 영국 플리머스의 메이플라워호 박물관은 그 전모를 이해하는데 매우 의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물관에는 종교적 박해에 대한 설명도 없고 청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떠난 사실에 대한 언급도 불분명하다. 다만 영국 각지에서 모여든 다양한 직업군과 다양한 연령대의 102명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갔다고 설명할 뿐이다. 또한 주요 설명이 미국의 원주민과 영국 이민자가 서로 도우면서 그 지역을 개척했던 측면을 강조하였다.

전시를 보다 보면 과거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한다기 보다 뭔가의 핵심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와 같은 전시 경향에 대해 영국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랬더니 자신도 영국이 솔직하게 과거 역사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모호하게 말하는 ‘역사 해체’ 작업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불만이라고 답하였다. 역사의 진실이 추해도 그것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진실된 역사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찾아 나갈 수 있는데 진정 영국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국가마다 강조하고 싶은 역사가 있고 숨기고 싶은 역사도 있을 것이다.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던 팔머스 항구는 밀수가 성행하던 곳이기도 하다. 불법과 합법이 정확하게 구분된다기 보다도 영국의 이익을 위한다는 차원에서 불법이 제국의 힘과 결합하여 세계를 지배하는데 기여하였다. 이것은 비단 영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고대로부터 역사 속에서 조금씩 다른 형태로 지속적으로 행해지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역사 앞에 당당히 선다고 하는 것은 힘들고 두려운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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