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 문학(사학)박사

▲ 고라마을(포항시 죽장면 상옥리) 전경
12월 14일에는 경주 외동 모화리의 봉서산에 있는 원원사(遠源寺)로 의병진을 옮기고 그 이튿날 절 동쪽 골짜기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여 적을 크게 물리친 후 보군 선위덕과 이대림 그리고 승장 찬홍으로 하여금 경주부윤의 군영에 승전보를 보냈다. 유정의 의병진에는 다수의 승려가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유정의 군량미 운송 현황을 살펴보면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가운데 적군의 공격을 피해가며 군량을 운반하는 일이 전투 못지않게 어려운 과업임을 알 수 있다. '송호유집' 임진년 6월 8일조, 아들 유영춘의 보고 내용에

전에 움막에 저장한 곡식 470곡은 대소미가 223곡 8두일 뿐입니다. 대룡포, 공암, 달현, 무룡령에서 월성의 진지에 이르기까지 군량을 운송한 것이 374두인데, 노약자에게 등에 지고 옮기게 하였더니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중도에 쓰러져 죽은 자가 18명이나 됩니다. 농사에 힘써야 할 계절에 때를 빼앗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저장한 400곡도 다시 도정한 뒤에 군사를 거느리는 것이 이치로 볼 때 만전을 기하는 방도입니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한창 적과의 전투가 치열한 임란 초기의 군량조달을 위해 울산지역 동해바다의 각 의병진과 경주의 남천 진지에까지 군량미를 운반하느라 농사철에 늙은 농부와 노약자를 동원하였다가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이 무렵에 경주 판관 박의장을 비롯하여 경주와 울산의 관-의병의 연합병력 약 4,000여 명이 남천(문천)에 진을 치고 금오산의 동쪽과 서쪽의 등성이를 따라 일본군과 치열한 유격전을 벌였다. 이때 열읍의 의병장들은 금오산(남산)에 올라가 강력한 쇠뇌를 쏘고 혹은 돌을 던지며 적을 교란시킨 다음 고개마루에 매복해 있던 의병들을 일시에 출격시켜 적을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군에게 쫓긴 적은 운문산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에 대하여 경주부윤 윤인함은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고 마포 20필, 홍주 9필을 내리고 울산의병 윤홍명, 이여량, 이응춘, 이눌, 유백춘 5의사에게 ‘용양대원수(龍驤大元帥)’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후 유정은 의병부대를 죽장의 고라로 옮기고 조카 유백춘과 의사 박인국을 권농도감으로 삼아 한동안 농사를 짓도록 조치하였다. 또 11월 19일의 일기 내용에

아들 영춘이 와서 보고하기를 “쌀 36석을 (경주)판관이 가져가는 바람에 겨우 보존하고 있는 8석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길이 멀고 고개가 험하여 허약한 군졸로는 멀리서 운반하기가 매우 어렵고, 또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도적도 두려워… 심원에 쌓아둔 207석은 군사들을 수일 머무르게 하고 보병 209명을 시켜 이곳으로 운반하게 하여 바위 움에 깊이 저장하고 암자의 스님에게 지키도록 분부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라는 기록을 통해, 의병들에게 먹여야 할 군량미를 경주판관 박의장(朴毅長)에게 징발 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유정이 이끄는 의병진이 울산을 떠나 수개월에 걸쳐 경주 일원의 여러 곳으로 진지를 옮겨 다니며 상당한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공이 관군에게 잠탈 당한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임란 초기에 관군과 의병간의 불화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임진년 9월 21일에는 경주 선도동 아래에 주둔하였는데, 그 달 26일 왜장이 적 수백 명을 거느리고 한밤중에 이동하는 것을 의병들이 고개 위에 잠복한 군사로 하여금 횃불을 일시에 붙이고 쌓아두었던 돌덩이를 아래로 향하여 던지며 기습 공격하여 적 34명을 죽이자, 경주판관 박의장이 즉시 달려가 이를 거두었다. 관군인 박의장이 의병들의 야간 매복에서 거둔 전과를 자신의 것으로 취하였다는 것이다.

경주부윤 윤인함이 이 날의 승리에 대한 축하연을 베풀며 의병장들을 불러놓고 “어제 저녁에 올린 전과는 과연 의병장들의 신묘한 전술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하여 판관에게 (그 공을) 양보하였소?”라고 하자, 의사 박인국이 창을 밀쳐놓고 말하기를 “참수한 적의 수효를 행조에 보고하여 감히 군공을 탐하는 것은 우리 주장(主將, 유정을 말함)의 평소의 뜻이 아니라 여깁니다.”라고 하였다. 이후에도 관군의 공적 잠탈과 의병활동을 방해하는 행위가 계속되자, 대장 유정은 휘하의 의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유백춘과 이여량을 시켜 경주부윤 윤인함에게 진언을 하였다.

“의병장들은 판관이 만류하는 바람에 남쪽에서 건너오는 적을 가서 막지 못했고, (판관을) 도와 전략을 짜서 (경주)성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전자에 적을 참획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공으로 삼고 박인국과 심희대의 공으로 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휘하의 의사들이 다시 힘을 다하여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본디 의병을 일으킨 것은 국난을 도와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이거늘, 충정을 가지고 겸양의 도리를 지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내일 새벽에는 즉시 군사를 출동하여 남영(南營)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경주 판관 박의장이 이끄는 관군이 유정 의병부대의 전공을 가로채자 의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이에 유정은 의병부대를 울산의 의병기지(남영)로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하는 내용이다. 경상좌도 의병의 경우 관군과의 협조체제가 원활했던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때로는 유정 의병진처럼 관군에 의하여 그 공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의 명운을 걸고 왜적과 전투를 이어가던 의병들은 전공을 다투는 관군의 허물을 덮어두었다. 그것이 대의와 명분을 중시한 의병들의 창의정신이었을 것이다. 경주 판관 박의장은 경주성 탈환과 울산, 경주의병들의 적극적인 호응에 힘입어 일약 경주부윤으로 승차할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에 밀양 출신의 전 만호 김태허(金太虛)가 울산지역의 방어에 나서 유정 휘하의 울산 의병과 연합활동을 펼쳤다. 이 때 군수 김태허는 휘하의 관군과 의병장 전응춘, 박홍춘, 서인충 등이 이끄는 의병진과 합세하여 적군을 막아냈는데, 육지에서는 일본군 50여급을 참수하고 바다에서는 40여급을 참수하였으며 적 함선 2척을 나포하였다. 이 전투와 그동안의 전공을 인정받아 김태허는 순찰사와 좌병사에 의하여 조정으로부터 울산 가군수에서 울산 실군수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상좌도 의병들이 보여준 관군에 대한 존중의식과 관군과의 긴밀한 협조체제 유지로 국난을 극복해 나간 충의심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임란 당시 울산, 경주의 의병들이 뜻을 모아 문천회맹을 결의하고 그 여력으로 경주부를 지켜낸 데 대하여 당시 부윤 윤인함은 경주부의 관아인 동도객관에다 충신지사들의 장렬한 뜻을 현판에다 새겨 내걸었다. 동도객관 벽상기에는 유정과 그의 아들, 조카, 손자 등 일가문의 의사들에 대하여 ‘나라를 지킨 장수들(干城之將)’이라고 대서특필 하고, 그 정신을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울산·경주지역의 의병활동은 일본군 주력부대가 동남해안 지역으로 대거 남하한 1594년부터 정유재란 당시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졌다.

유정은 1594년 영천 창암전투에서 아들 유영춘이 전사한 이후에도 계속하여 조카 유백춘, 손자 유태영과 더불어 왜적의 퇴치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유정은 정유재란기인 1597년 9월 대구의 팔공산 전투에서 적탄을 맞아 전사하였으며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고 양산 칠현사에 제향되었다. 그러나 많은 전공을 쌓고도 그 공을 주변인들에게 양보해 온 유정 의병장의 처세관을 되새겨볼 때, 원종공신 3등의 훈록은 그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후세인들의 뜻에는 미흡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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